당시 근처 국경 개방된 곳이 사모아랑 통가밖에 없었다. 원래는 사모아로 넘어가려 했지만, 사모아 비행기표가 다 매진되어 있었다. 1년 전 통가에 화산 폭발이 엄청나게 크게 일어나 걱정되었지만, 통가 현지 호텔을 운영하는 사람이 괜찮다고 정상화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바누아투에서 피지를 경유해 통가로 넘어왔다.
통가 지도를 보면 섬들이 다 멀리 퍼져있다. 통가에 거주하는 인구는 10만 명이며, 해외에 사는 사람은 20만 명 정도 된다. 내가 이전에 여행했던 나라 바누아투 사람들은 멜라네시아계였는데, 이번에 여행하는 통가는 폴리네시아계이다. 이전 바누아투 여행기와 비교하면 사람들의 외모가 다른 걸 볼 수 있다. 멜라네시아계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비슷해 보이는데, 폴리네시아계는 동남아 사람들과 비슷해 보인다.
호주 자전거 가게에서 얻은 상자다. 이 상자로 무려 4번 넘게 비행기를 탔다. 그래서 상자가 너덜너덜한데 테이프를 붙여 계속 사용했다. 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호텔 차를 타고 이동했다.
팬데믹 이후 혼란을 겪는 내 마음을 다잡으려고 바누아투에서부터 크로핏을(CrossFit) 시작했다. 통가에서도 찾아보니 크로스핏하는 곳이 있었는데 숙소 근처였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대충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중년 여성 호텔 사장님은 아침 일찍은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막상 길을 보니 새벽 기도 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길 위에 여러 사람이 다니는 게 보여서 안전하게 느껴졌다. 뛰면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크로스핏하고 나면 땀을 엄청 많이 흘리고 무엇보다 단체로 하는 운동이다 보니 동기부여가 되어 좋았다.
숙소에 조식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밖 풍경 보며 먹으면 정말 좋다. 피지 USP 대학에서 500원에 판매하는 책이 있어서 샀었다. 남태평양에 있는 솔로몬제도 여성들이 1970~80년대? 일어났던 일들을 익명으로 풀어 담아낸 이야기였다. 강요된 결혼, 대학 졸업한 여성이라고 상대방 남자 집 쪽에서 결혼 반대, 사랑하던 현지 남성을 버리고 외국 남자와 떠남, 친구 셋이 섬에 나무 구하러 갔다가 남성에게 납치당할 뻔함,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학교 마치고 선생님 되기 등 다양한 사연이 적혀 있다.
통가 지폐. 통가 물가는 피지랑 비슷하거나 피지보다 조금 저렴했다.
시내로 가는 길옆에는 과일을 파는 현지인이 보였다.
통가가 화산 폭발 이후 사라졌던 것처럼 보도했던 전 세계 뉴스와 달리 통가는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통가가 일상을 되찾은 지 1년이 넘었지만, 통가의 평온함을 후속 보도하는 곳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시내에는 서점과 피시방을 함께 운영하는 곳을 볼 수 있었다.
CD 판매점도 있었는데, 한국 영화, 음악, 드라마도 꽤 있었다.
통가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이었는데 뉴질랜드 제품이 꽤 많이 들어와 있었다. 물론 호주 제품들도 들어와 있었다. 참고로 시골 포함 통가의 거의 모든 슈퍼마켓은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과일 야채 시장도 있었고 그 옆에 수공예품 파는 곳도 있었다.
시장 옆에서는 현지인들이 체커를 즐기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이 수중 럭비를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주말이면 큰 시장이 열리는 곳이 있었는데 대부분 옷을 팔고 있어서 내가 살 건 없었다. 신기했던 게 대부분 차 안에서 천천히 이동하며 둘러보고 있었다. 미국의 드라이브스루처럼 보였다. 통가에서는 모든 집들이 차 한 대씩은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통가 관광 공사 직원을 알게 되었는데 그분의 초대를 받아 모르몬 교회를 가게 되었다. 앞에서는 화산 폭발 당시 일어났던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비록 지금 통가가 일상으로 회복했지만, 당시 충격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다.
통가도 피지 바누아투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기독교를 퍼트린 서양에서는 독실한 종교인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남태평양은 아직도 굉장히 신성한 종교인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교회를 가는 일요일에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다. 개인적으론 피지와 바누아투에서 일요일만 되면 매우 조용해져 정말 좋았다.
하지만 통가는 훨씬 더 독실한 종교인이라 호텔과 식당 세 곳을 제외하곤 일요일에 모두 문을 닫았다. 모든 게 다 멈춰버린 거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철저하게 다 문 닫아 버린다.
통가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는데, 혹등고래 투어라는 게 있다고 한다. 7시간 투어에 U$200였고 통가는 혹등고래와 함께 수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꽤 비싼 투어였지만 일생에 한 번밖에 없을 기회 같아 하게 되었다.
숙소 근처에 혹등고래 투어 회사가 있어서 거기서 배를 타고 나갔다. 당일 총 12명이 투어를 신청했고 총 3팀으로 나뉘게 되었다. 대략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나갔다. 이후 근처를 돌면서 혹등고래를 찾았다. 혹등고래를 발견하게 되면 주변에 배를 세우고 엔진을 끈다. 이후 세 팀이 각자 차례가 오면 수영해서 혹등고래에게 가는 건데 정말 체력적으로 엄청 힘든 투어였다.
혹등고래가 나타나면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바로 바다로 뛰어 들어간다. 이후 가이드를 따라 미친 듯이 헤엄쳐 나가는데, 대부분 혹등고래가 저 멀리 헤엄쳐 사라졌다. 이걸 3~4번 반복하다 보면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한번은 혹등고래가 저 멀리 점프해서 정말 멋졌다. 오후가 되었는데 혹등고래와 수영을 하지 못했다. 이후 간단한 점심을 먹고 다시 주변을 돌다가 우리 팀 부르는 소리가 나서 재빨리 장비를 착용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미친 듯이 헤엄을 쳤다.
도대체 혹등고래는 어딨는 건가, 이번에도 또 허탕 친 건가 싶었다. 다음팀을 위해 배로 돌아가야 하나 싶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물 밑에서 혹등고래 한 마리가 보였다. 혹등고래는 남극에서 헤엄쳐 통가에 와 새끼를 낳고 3~4개월 이후에 다시 남극으로 떠난다고 한다. 그런데 어미 고래가 보이질 않아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어미 고래와 새끼 고래 사이에 낀 건가 싶어 걱정하던 찰나 밑에 엄청나게 거대한 고래가 나타났다. 어미 고래라고 생각했던 게 알고 보니 새끼였다. 이렇게 멋진 장관을 보여준 혹등고래에게 정말 감사했다. 종일 헤엄친 보람이 있었다.
이후 항구로 돌아왔는데, 현지 어부는 그날 잡은 고기를 팔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통가를 자전거로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 속에 보이는 멋진 큰 집들이 정말 많았다. 피지 바누아투보다 통가 사람들이 훨씬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보인다. 통가의 많은 사람이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일을 해 돈을 부쳐줘 그런 거 같다.
하룻밤 현지인에게 허락 받고 앞마당에 텐트를 쳤다.
다음 날 아침 길옆에 바베큐를 파는 여성이 보여 멈춰서 한가득 고기를 샀다. 통가에서는 바베큐와 프라이드치킨을 파는 곳이 많아서 거의 매일 같이 먹었다.
리조트가 들어있는 해변가에 들어서자, 화산폭발의 쓰나미로 인해 무너진 건물 잔해가 보여 안타까웠다.
대부분의 현지인 집은 침수 피해만 보았는데, 바닷가에 지어져 있는 리조트들은 붕괴하였다. 당시 코로나로 인해 국경이 닫혀있어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 돌덩어리는 쓰나미로 몰려온 돌 중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돌덩어리라고 한다.
굉장히 멋진 곳들이 중간 중간 나와서 좋았다. 이후, 숙소를 찾지 못했는데 밤이 찾아왔다. 한 현지 가정집에 텐트를 쳐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안에서 자라고 초대받았다. 이후 남성분께서 여권을 보여달라고 하셨고 이후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다. 아프리카에서도 하룻밤 텐트 허락 받으려고 때 여권 보여 달라고 한 적이 꽤 있어서, 낯선 경험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너무 배고팠지만, 문 연 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길옆에 키우는 돼지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왜 돼지고기 바베큐는 안 파는 건지 모르겠다. 돼지고기는 가족 행사할 때만 잡아먹는 거 같다.
통가에서 제일 유명하고 중요한 유적지에 왔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무리 중요한 관광지일지라도 일요일엔 문을 닫는다.
줌을 당겨 사진을 찍었다. 13세기에 지어진 통가 유적지다. 인간이 들기엔 너무 무거워서 신 마우이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남태평양에서 유적지 관광은 처음인 거 같다. 아무래도 자연재해가 잦다 보니 그런 거 같은데, 여전히 살아남은 유적지의 위엄이 느껴졌다.
단체 관광객들이 온 다 해도 문 안 열어주는 건 똑같다.
얼마 안 가 또 다른 유적지가 나왔지만 여기도 문을 닫았다.
교회 앞에서 현지 분과 얘기하다 사진을 찍게 되었다. 현지인들은 고유의 전통복을 행사나 예배 때 입는다.
자전거를 타면서 모르몬교를 자주 보게 되었다.
세계 여행을 하다 보면 모든 나라가 제각각 다른 매장 풍습을 갖고 있는 걸 보게 된다.
또한 각 나라가 중요시하는 사회 문제를 광고 표지판을 통해 보게 되기도 한다. 통가 비만율이 높다고 하는데, 통가에 지내면서 매일 프라이드치킨과 바베큐 치킨을 먹었기에 내가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된다.
사진 맨 위 광고판 같은 걸 자주 보기도 했다. 대출 광고인지, 회계 광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거의 동네마다 이런 걸 운영하는 집들이 많아 보였다.
바누아투, 피지에선 일요일에 주유소 같은 곳은 문을 열었는데, 통가는 아주 엄격하게 주유소 또한 문을 닫았다. 이후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아무리 천천히 달려도 섬이 작다 보니 이 삼일이면 한 바퀴를 돈다.
혹등고래 수영이 당시 너무 짧았던지라 아쉬워서 이번에는 바바우섬이라는 곳에 가서 해보기로 했다. 바바우섬과 수도를 이어주는 배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출항하지 않는데, 파도가 거칠면 취소되기도 한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일주일 뒤에 출국할 비행기표를 구매해 놔서 만약 다음 주에 배가 취소되면 내 비행기표는 자동으로 잃게 된다. 제발 날씨에 별문제가 없길 빌며 배를 탔다.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왔는데 다행히 내 자전거는 철창에 갇혀 바닷물을 피했다.
24시간 넘게 걸리는 배라, 가는 길에 영상편집을 좀 했다. 세계여행하면서 제일 힘든 일 꼽으라고 하면 블로그 글과 영상 업데이트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기를 올리고 나면 배우고 느꼈던 걸 정리할 수 있어 반드시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새벽에 잠들었다가 눈을 깼는데 배가 조용했다. 알고 보니 중간지점에 잠깐 섰던 것이다. 배 안에서는 제대로 된 음식을 팔지 않아서 서둘러 나가려 했지만, 이미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과자와 커피를 사서 아침을 해결하고 피지에서 샀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바바우섬에 다다르자, 물색이 확 달라 보였다.
드디어 바바우섬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그날 잡아 파는 생선들이 보였다.
마을은 작고 아기자기했다. 저 멀리 많은 세일 보트도 보였다.
마을에는 서양인이 20년 가까이 운영하는 카페가 하나 있었다. 카페 창문에는 그동안 휩쓸고 온 태풍 목록이 적혀 있는데, 이 모든 태풍에서 카페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남태평양이 발전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잦은 자연재해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 번씩 큰 태풍이 몰려오면, 복구 비용으로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관광 사무실에 들러 혹등고래 회사 정보를 물어보고 나오는데, 앞에서 통가 전통춤을 연습하는 소녀들을 운 좋게 보게 되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관광업이 손해를 입었는데, 거기에 더해 화산폭발 후 통가가 마치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도한 전 세계 뉴스로 인해 관광업이 엄청나게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당시 혹등고래 투어를 진행하는 회사를 찾는 게 어려웠다. 다행히 시간이 맞는 관광회사 하나를 찾게 되었다. 우리 배에는 총 5명이타서 두 팀으로 나뉘어 저번보다 더 많이 수영할 수 있게 되었다.
한참 배를 타고 가다가 혹등고래를 발견해 배 안의 모든 사람이 흥분했다. 다들 서둘러 준비하고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고래는 시야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이후 다시 배에 오르고 수영하길 반복했다. 가이드는 고래가 우리랑 수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이동하자고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의문을 품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똑같은 고래를 스토킹했던 건가?
이후 꽤 먼 곳으로 나왔는데 파도가 거칠어서 걱정되었다. 이후, 다시 파도가 잔잔한 곳으로 이동해 배 안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시 배를 이동했는데 거기에 또 다른 관광 배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어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혹등고래가 굉장히 정적이어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두세 번 수영을 마치고, 가이드가 이제 고래도 쉬어야 하니 그만 가자고 했다.
돌아가는 길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동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의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동물원도 안 좋아하고, 동물 쇼도 안 좋아한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투어 방식이 혹등고래 투어 방식과 비슷했지만, 아프리카 사파리는 워낙 땅이 크고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보기 때문에 죄책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최근 피지에서 가오리와 함께한 투어도 비슷하긴 했지만, 그 지역에 워낙 자주 가오리가 출몰해서 계속해서 배를 타고 쫓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투어가 불편했던 큰 이유는 갓 태어난 애기를 돌봐야 하는 예민한 어미를 쫓아 다녔기 때문이다. 유튜브로 혹등고래 투어를 봤을 땐, 고래가 얌전히 가만히 있는 거 같아서 귀찮게 하는 모습을 못 느꼈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투어를 진행 해 보니 영상에서 봤던 것과 달리, 이 고래 저 고래를 계속 쫓아다니며 스토킹 짓을 하는 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암컷 고래는 남극에서 남태평양까지 6,000km를 헤엄쳐 온 후 새끼를 낳고 7월부터 10월까지 아기를 돌본다. 하루에 2톤의 크릴새우를 먹는데, 새끼를 낳고 기르는 동안 암컷 고래는 몇 달 동안 먹을 수 없다. 암컷 고래는 남극으로 돌아갈 때까지 체중의 25%를 잃는다.
통가 정부는 인근 타히티와 프렌치 폴리네시아보다 혹등고래 관광을 훨씬 엄격하게 법으로 관리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를 않아 다음에 혹시 다시 기회가 되더라도 혹등고래 투어는 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파리 투어도 스토킹하는 짓이라며 안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기준에선 아프리카 사파리 투어는 괜찮았다. 이건 각자 사람마다 정한 기준에 따른 문제 같다. 그러니 혹등고래 투어를 하고 싶다면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
한가지 팁을 주자면 혹등고래 때문에 통가에 온다면 못 해도 일주일에 3~4번 투어를 해야지만 만족할 수 있고 한 번 할 때마다 못해도 U$200~U$300가 들며 혹등고래를 못 보고 돌아갈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하자.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 꼭 갖춰줘야지만 할 수 있는 투어이니 미리미리 체력을 키워야 한다. (체력이 딸려 수영을 빨리 못해서 혹등고래를 못 본 사람이 우리 배에 있었다)
혹등고래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장례식 진행을 하는 현지인을 보게 되었다.
자전거로 섬을 한 바퀴 둘러보기 전 항구에 가서 배편을 알아봤다. 다행히 이번 주 배편이 별문제 없이 진행될 거라고 한다. 항구 직원분이 전통의상을 입고 계셔서 같이 사진을 찍게 되었다.
마을에 있던 성당
본섬보다 바바우섬이 훨씬 아름답고 예뻤다.
해변에서 쉬다가 배를 기다리는 현지인과 이런저런 얘기도 할 수 있었다.
시골에 있던 교회인데, 저 앞에 있는 나무통을 쳐서 예배 시간을 알린다.
섬 한쪽엔 여러 세일 보트가 보였는데, 장기간 배를 보관해 주는 곳이라고 한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있어서 캠핑카 공원처럼 여기에 배를 장기간 대놓고 머무를 수도 있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 세일 보트를 하나 장만할 수 있으려나? ㅎ
바바우섬을 뒤로하고 본섬으로 가기 위해 페리를 탔다.
오후 늦게 중간 지점에 배를 세웠다.
저번에 잠자느냐고 놓쳤던 섬을 구경하고 먹을 간식도 샀다.
해 질 녘 항구를 떠나는 배
밤늦게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섰고 작은 배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주변 섬에서 배를 끌고 나와서 물건을 주고받고 사람을 태우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한밤중에 자는데 갑자기 간지러웠다. 모기 날라 다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에 뭔가 싶어 주변을 살펴 보다 빈대 한 마리를 발견했다. 피지, 바누아투, 통가에서 연속으로 빈대에게 물렸다. 하지만 남태평양 빈대는 다른 대륙 빈대와 달리 물리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고 미친 듯이 간지럽지 않아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본섬에 도착했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통가를 떠나는데, 떠나기 전 관광공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통가에 원자폭탄보다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며 전 세계 뉴스가 났지만, 통가의 일상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는 곳은 한 곳도 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인터뷰 영상에는 화산폭발 당시 영향이 어떠하였고, 어떤 과정을 통해 복구했으며, 현재는 어떤 상황인지를 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청한 사람은 별로 없다. 여행 블로그와 SNS를 운영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거 같다. 팔로워가 부족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통가 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통가 사람들은 통가가 하나의 독립 국가가 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한 번도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큰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남태평양을 보면 멜레네시아 나라들 모두는 독립 국가이고, 마이크로네시아는 괌만 빼고 모두 독립 국가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폴리네시아 나라들은 다른 나라에 땅을 내줬다.
왜 대부분의 폴리네시아 나라들은 독립 국가가 되지 못했을까?
대략 5,000년 전부터 대만에 살던 원주민이 남태평양 전체로 퍼져나갔다.
대략 3,000년 전에 필리핀에 먼저 정착을 하고, 이후 파파뉴기아, 피지, 뉴칼레도니아,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로 퍼졌는데 여기 사는 사람들은 말레네시안이 되었다.
대략 2,000년 전에 북쪽으로 항해를 해 정착한 사람들은 마이크로네시안이 되었다.
대략 1,000년 전에 더 멀리 동쪽으로 항해 해 정착한 사람들은 폴리네시안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짐작하는 바로 대부분의 폴리네시안 나라가 독립국가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서로 함께 뭉쳐 산 기간이 오래 되지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사모아와 통가의 첫 인류가 시작된 점이 대략 2천년에서 3천년 사이로 다른 폴리네시아 나라 보다 정착 역사가 빠르고, 이 점이 독립 국가로서 설 수 있는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이렇게 남태평양의 이주 역사를 보니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인류가 다 흩어지게 된 건지 궁금해졌다.
[위키피디아 호모 사피엔스 이주 지도 (Kya는 천 년을 의미한다.)]
제일 처음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곳은 아프리카로 20만 년 전이다. 이후 각 대륙으로 이주했는데 순서를 보면 이렇게 된다.
아프리카 20만 년 전-> 중동 7만 년 전-> 남아시아(인도), 호주 6.5만 년 전-> 터키 5만 년 전-> 유럽, 중국 4.5만 년 전-> 남러시아 4만 년 전-> 한국, 일본 3.5만 년 전-> 북러시아 3만 년 전 -> 북미 1.6만 년 전-> 중남미 1.4만 년 전 -> 북유럽 극동 1.2만 년 전-> 마이크로네시안, 멜라네시안 5천 년 전 -> 폴리네시안 1천 년 전
피부색은 왜 이리 달라졌을까? 멜라닌은 자외선으로부터 DNA가 손상되는 걸 방지해 준다. 멜라닌은 흑갈색의 색소라서 많이 만들어지면 피부색이 짙어진다. 그래서 자외선이 강하게 내리쬐는 남반구에 사는 인종은 짙은 피부색을 지녔고, 북반구에 사는 인종은 옅은 피부색을 지니게 되었다.
인류의 이주 역사는 굉장히 천천히 진행되었기에, 갑작스러운 이주는 신체에 이상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북반구 유럽계 사람들이 남반구 호주 같은데 정착하게 될 경우 멜라닌 부족으로 피부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고, 남반구 아프리카 사람들이 북반구 북미나 유럽에 정착할 경우 지나친 멜라닌으로 인해 뼈가 휘거나 약해지는 구루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출처 영상)
떠나는 날 아침에도 크로스핏하러 갔다. 땀을 정말 많이 흘리게 되어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숙소 주인분이 키우던 다리 세 개인 개. 다리가 네 개인 개도 한 마리 더 있었는데, 그 친구보다 훨씬 더 활발했다.
다 먹은 약은 자르고, 남은 약 끝은 날카롭지 않게 잘 다듬어서 봉지에 넣는다. 가끔 이렇게 약 정리를 해줘서 부피를 줄여본다.
두 겹의 가방으로 해서 훨씬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남태평양에서 계속 비행기 타다 보니 자전거를 상자에 넣는 걸 한 시간 안에 할 수 있었다. 남태평양의 다른 섬도 구경하고 싶었지만, 매번 자전거를 비행기에 태우는 비용도 비쌌고 남태평양이 전체적으로 물가가 비싸서 곧 파산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쉽지만 통가를 마지막으로 하고 남태평양을 떠나려 한다.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남태평양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해 다양한 문화를 배워보고 싶다. 팬데믹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든 점이 많았지만, 오히려 팬데믹 때문에 남태평양이라는 새로운 대륙을 알게 되어 정말 좋았다.
블로그 쓰면서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태평양을 처음 방문한 건 2012년 모아이 석상이 있는 라파 누이 이스터섬이었다. 당시 폴리네시아에 대해 설명할 때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는데, 지금 다시 가서 이전 블로그 글을 보니 머리와 심장으로 완벽히 이해가 된다. 남태평양 여행은 인류의 7번째 대륙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춘 느낌을 줘 이 대륙을 안 건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022년 연말 드디어 대만 국경이 문을 연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무려 비행기를 나흘 동안 4개나 경유해 타야 한다. 가장 크게 걱정되는 점이 너덜너덜한 상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남태평양에 제대로 된 자전거 가게가 없다 보니 상자 하나로 버텼는데, 끝까지 잘 살아남아 주길 바라며 공항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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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전거 여행 중에 여행기를 쓰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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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가 여행 영상 모음===
피지에서 통가로 가는 여정 브이로그
통가 수도 브이로그
통가 자전거 한 바퀴 여행
혹등고래 투어 브이로그
바바우 섬 자전거 여행 브이로그
통가 화산 폭발 당시 상황과 1년 후 통가 현재 상황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