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북한 국경-러시아) 여행 마지막에 느끼는 슬픈 분단 현실과 거기서 만난 복잡한 한인 디아스포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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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년의 세계 여행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원래는 대만을 해외여행 마지막으로 하고 한국에 귀국하려 했는데 지도를 살펴보다가 계획을 변경했다. 자전거를 타고 중국과 북한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쳐 백두산을 보기로 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 했던가? 전 세계 6개 대륙을 무사히 자전거로 여행하면 꼭 북한을 통해 돌아오겠다는 꿈을 꿨지만, 12년이 세월이 흘러도 불가능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라도 달래보려 한다.

홍콩에서 중국 비자를 30일밖에 받지 못해서 시간이 부족해 비행기를 타고 중국 대련으로 넘어왔다. 공항이 꽤 컸는데 놀랍게도 ATM이 없었다. 중국이 현금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걸 들었지만 공항에서 ATM까지 없앨 줄은 몰랐다. 자전거 일부 부품을 조립할 도구가 없어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해야 했는데 ATM이 없어서 택시를 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일부 나사를 조립하고 아슬아슬 자전거를 타고 숙소에 새벽 1시가 되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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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주변 거리를 걷다 보니 한국어 간판과 음식점이 의외로 자주 보였다. 대련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시내에는 다행히 ATM이 있어서 돈을 뽑고 아는 분 도움으로 알리페이 계정도 생성해 그곳에 돈을 넣었다. 확실히 현금 없이 다니면 편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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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지도에서 이번 포스팅과 관련된 지역을 검은색으로 표시해 두었다. 대련(Dalian)은 이번 중국 여행에서 처음 도착한 곳이다.
북한과 중국은 강으로 국경이 나뉘는데,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두만강이며, 그 사이에 백두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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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부터 2017년 4월 봄까지 중국 서북부 신장에서 중남부 운남까지 자전거를 탔었다. 6년 만에 다시 온 중국, 무엇이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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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할 때 정말 좋아했던 것이 음식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먹어본 중국 음식은 여전히 맛있다. 6년 전 중국 여행할 때 물가가 그다지 저렴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이 온 이 시점에는 중국 음식 물가가 저렴하게 느껴졌다. 식사 한 끼에 2,500원에서 3,500원밖에 안 됐다. 최근에 갔다 온 필리핀보다 식당 물가가 더 저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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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본떠 만든 테마파크가 있는데, 그럭저럭 비슷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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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에는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었는데, 바로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여순감옥이다. 여순감옥은 일본이 중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1902년에 건설한 감옥으로, 많은 중국인이 투옥되었으며, 특히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감옥은 일본에 의해 1945년까지 운영되었다. 실제로 감옥을 방문해 보니, 당시의 고문 및 처형 방법, 강제 노동을 통한 수익금 내역, 사형장 등을 보존한 채 전시하고 있어 여순감옥을 둘러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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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단죄한 후 체포되어 국사범으로 분류되었고, 다른 수감자들과 분리되어 간수부장 당직실 옆의 독방에서 24시간 감시를 받았다. 다른 감방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독방은 어떤 곳과도 연결되지 않은 독체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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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을 떠나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는데,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시골 도로가 6차선으로 엄청나게 잘 포장된 걸 보고 무슨 이유로 이런 도로가 만들어졌는지 궁금했다. 이후에도 이런 도로를 가끔 보게 되었다. 아스팔트 1km를 짓는 데 대략 1~3억 원 정도가 들며, 6차선 도로의 경우 1km에 10억 원까지 든다고 한다.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이 시골 도로에 백억 원 가까이 쏟아부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에 돈이 많아서 이렇게 도로를 지어도 별문제가 없어서? 혹은 어떤 정치인이 부패한 돈을 얻으려고 도로를 막 지었나? 아니면 이 지역을 개발하려다가 잘되지 않아 방치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다음 개발 단계로 가기 위해 잠시 멈춘 상태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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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골 마을에 도착했는데, 이곳에도 아스팔트 도로가 넓고 잘 포장되어 있었다. 시골이다 보니 삼륜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사진은 화장실입니다. 방금 식사하셨거나 음식을 먹고 계신 분은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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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방문했지만, 시골 화장실 문화는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칸막이가 여전히 없었다. 놀랍게도 외관은 굉장히 화려했기에 실내도 잘 되어 있을 거로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토할 뻔했다. 급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볼일을 봐야 했다.
나는 가끔 화장실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문이 안 닫히거나, 모든 칸이 너무 더러워서 볼일을 볼 수 없는 그런 악몽인데, 그 악몽을 중국에서 몇 번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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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에 돌아와서 바뀐 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탐폰이 있다는 것! 6년 전 중국 여행을 할 때 시안이나 청두 같은 대도시의 까르푸에도 없었는데, 시골 슈퍼마켓에서 이게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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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내에서 흡연은 여전히 자유로워 보인다. KFC 같은 패스트푸드점이나 대도시의 깔끔한 식당에서는 이런 광경을 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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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곳을 지나가다가 숙소가 보여 들어갔는데, 의외로 머무는 사람이 많았다. 학교를 개조해서 만든 숙소인 듯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놀러 온 가족들도 있어 보였고, 주변 갯벌 체험하러 온 가족들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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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 중국 시장 풍경. 갓 튀긴 바싹한 꽈배기를 사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후 열심히 달려 한 도시에 도착했는데, 순간 충격을 받아 잠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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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도 별로 없는데, 엄청나게 넓은 10차선 도로가 마치 TV에서 본 북한 도시처럼 보였다. 순간, 혹시 실수로 북한에 넘어온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어 놀란 가슴으로 지도를 확인했다. 다행히 지도에는 여전히 내가 중국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텅 빈 건물들이 계속 이어졌는데, 공사 중이라면 크레인이 보여야 할 텐데 전혀 보이지 않았고, 완공된 건물이라기엔 지나치게 삭막해 보였다. 도시 개발이 실패한 걸까? 아니면 잠시 중단된 채 2차 개발을 기다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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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진입하자 사람들이 제법 보이기 시작했고, 광장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해 질 녘에 공원에서 춤추는 사람을 항상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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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낯선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이 느낌.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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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숙소 입실을 거절당했다. 2016년, 중국에서 6개월 동안 여행할 때는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숙소 주인의 딸은 내가 머물 수 있다고 말하며 방도 보여줬었는데, 그녀가 아버지와 통화한 후 오늘은 숙소가 꽉 차서 방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방을 보여줄 때만 해도 여러 방이 비어 있었다. 전화 통화 중에 “한궈”라는 단어를 들었기에 외국인이라서 거절당하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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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른 숙소를 확인했는데,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곳이라 놀라서 빠져나왔다. 다행히 이후 제법 괜찮아 보이는 숙소를 발견했다. 사장님은 내 여권을 대충 확인한 후 장부에 이름만 적고 입실을 허락해 주셨다. 하룻밤에 100위안(2만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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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카메라가 엄청 많았는데 심지어 차가 거의 없는 시골길인데 나뭇가지에 카메라가 달린 경우도 봤다.
특히 북한 국경 지역에는 더욱더 카메라가 많았다. 탈북자들이 중국을 거쳐 몽골이나 동남아로 간 다음에 한국으로 온다고 한다. 그런데 카메라가 많아지고 더군다나 얼굴 인식 기능을 가진 카메라들이다 보니 탈북이 어려워지지 않나 싶다. 2019년 탈북자 수가 1,000명이었지만 2024년 탈북자 수는 200명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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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거쳐 달리다가 드디어 북한 국경 지역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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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북한이 도로에서 너무 가까워 깜짝 놀랐다. 강 건너편이 바로 북한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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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책 옆에는 ‘담을 넘지 말고, 담 사이로 물건을 던지지 말며, 담 너머로 대화도 하지 말고, 물물 교환도 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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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철책 옆을 자전거 타고 가다가 드디어 단둥에 도착하게 되었다. 압록강 저 너머에는 북한이 있다. 정말 믿을 수 없던 것은 중국 사람들이 저 강에 멀리까지 들어가 낚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저 풍경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한가롭게 낚시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보면 자유에 대한 갈망이 들지 않을까? 아니면 억압이 너무 익숙해져서 자유를 모른 채 그냥 그대로 살아가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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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는 망원경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중국인들이 망원경을 통해 북한을 구경하고 있었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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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낚시꾼은 이 지역에 사는 현지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압록강 너머에 있는 북한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강가 앞에 많은 아파트들도 있었는데 매일 같이 보는 풍경이 북한이라니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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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갯속의 북한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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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좋은 성능이 아님에도 확대하니 건물들이 자세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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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 시내 강가에서 보이는 북한 풍경. 맨 왼쪽 건물은 태양 아파트라고 하며 일심단결이 쓰여 있다고 한다. 정확한 용도는 모르며 중국을 향한 선전용, 혹은 중국에 인력을 파견하기 전 교육하는 곳이란 추측이 있다. 맨 오른쪽 건물은 불빛이 다 꺼져 있는데, 태양 아파트는 대부분 불이 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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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중국은 여름철 휴가철이라 관광객 인파가 어마어마하게 많았었다. (사진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늦은 밤에 찍은 사진)
공원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가족끼리 놀러 온 피서객 등으로 공원은 활기찼고 각종 불빛으로 엄청나게 휘황찬란했는데 저 반대편 북한은 어둠 속에 사라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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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사라진 저곳이 바로 우리 한반도의 반이라는 사실이 슬펐다. 단둥에서 지내는동안 자주 이곳에 나와 봤는데 특히 밤만 되면 어두워지는 저곳을 보니 현실이 너무 뼈저리게 느껴져 단둥에서 지내는 내내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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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한인이 운영했던 곳인데 상권이 거의 죽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에 긴장감이 고조 되었던 상황이라 한국인들을 향한 중국 정부의 압박이 심해졌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단둥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5년짜리 중국 비자를 갖고 있어도 6개월마다 한국을 다녀와야 했고 수시로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코로나 상황이 끝났음에도 한국-중국 노선 페리 대부분이 재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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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상권과는 정반대로 단둥 야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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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으로 압록강 너머를 보는 중국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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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나 또한 동전을 넣고 봤는데 굉장히 잘 보여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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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둥엔 여러 북한 식당도 있었지만, 당시 한국 사람이 들어가면 바로 거절한다고 해서 시도조차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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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너머 보이는 북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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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침침한 북한 보다가 밝은 중국의 도시 풍경을 보니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나는 행복하지만 주변이 행복하지 않을 경우 나의 행복은 계속 해서 유효한가?’?
내 대답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주변이 불행한데 나만 행복하기에는 어렵다. 주변과 함께 잘 살아가야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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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데, 특히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은 음식 배달원이다. 나 또한 중국에서 지내면서 음식 배달을 자주 시켜 먹었다. 가격도 배달비 포함 2~3천 원밖에 안 했고, 배달도 매우 빨리 왔다. 배달원들은 한 달에 백만 원 가까이 벌 수 있다며 나름 배달 일에 만족한다고 들었다. 정부에서는 일반 스쿠터 사용을 금지하여 대부분 전기 스쿠터를 사용한다고 한다.

한 달 만에 자전거로 대련에서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다 보는 일정이 빠듯했다. 그래서 비자를 연장하러 이민국에 갔는데 바로 거절당했다.
6년 전에 중국 여행 당시 사드로 중국과 관계가 엄청나게 악화하였을 때도 비자 연장을 무려 3번이나 했었던 지라 당황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민국에서 내 여권을 확인하며 어디에 머물고 있냐고 물어봐서 내가 머문 숙소 북킹 페이지를 보여줬다. 그곳은 trip.com에서 예약한 곳이었고 사이트에는 분명 외국인 주숙등기가(주소 등록) 가능한 곳이라고 했다. (Trip.com은 중국 Ctrip이 인수해서 중국에서 머무를 때 유용하게 쓰인다)이후 숙소로 돌아갔는데 알고 보니 내 주숙등기가 안 되어 있어서 숙소에 경찰이 찾아왔다. 이후 짐을 경찰 승합차에 싣고 경찰서에 가서 계속 앉아 있어야 했다. 구글 번역기를 쓰려고 해도 그냥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이러다 수갑이라도 차는 건가 싶었는데 4시간이 지나서 밤 10시쯤 결국 보내줬다. 경찰 말로는 전문 번역가를 부르려고 했는데 안 되어서 그냥 보내준다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야 한다고 했다.
숙소를 다시 예약했고 경찰차를 타고 그 숙소로 이동했다. 경찰은 체크인까지 하는 걸 보고 방까지 함께 올라온 뒤 내일 아침에 보자며 떠났다. 다음 날 아침 경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해결되었으니, 경찰서 방문 없이 다음 여행지로 이동해도 된다고 했다.

여행하면서 경찰서에 텐트 치고 자거나 경찰차 도움을 받아 이동한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경찰차를 타고 (어떻게 보면 끌려 나온 것?), 경찰서에 대기해야 했던 건 처음이라 범죄자 취급당한 거 같아 좋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Trip.com에 이 사건에 대해서 따졌고 15,000 coins (20만 원) 바우처를 받고 끝났다. 외국 땅에서 그것도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소송절차가 복잡할 수 있고 소송 자체도 해본 적이 없기에 그냥 바우처 받고 끝나는 거 말곤 할 게 없었다.
어떻게 보면 공짜 돈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20만 원 안 받고 이런 일 경험하지 않는 게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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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명 넘는 외국인들이 있는 중국관광비자 와썹 그룹에서 거절 받은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에 단둥은 예민한 지역인가 싶어 선양 (Shenyang)에 가보기로 했다. 선양은 동북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기에 거기 가면 나 또한 연장이 가능하지 않나 싶었다. 시간이 없어서 기차를 타야 했는데 자전거는 다음날 따로 도착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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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에 도착 후 앱을 이용해 택시를 불렀는데 티비를 보면서 운전하시는 기사님. 의외로 기사님 평점이 굉장히 높았다.

선양의 이민국 건물은 매우 컸다. 들어가서 비자 연장을 물어보자 30일이면 충분하다며 칼같이 거절했다.
외국인 300명이 넘게 가입한 중국 비자 와썹 그룹에서 비자 연장 거절 받은 사람은 나를 제외하곤 단 한 명도 없었다. 시골이든 대도시이든 모두 비자 연장 받는 게 쉬웠다며 후기를 남겼는데 그 쉬운 남들 다 받는 비자 연장이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 싶었고, 선양도 어쨌든 단둥과 같은 지역권이기에 베이징에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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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베이징에 자전거를 들고 가면 화물 편으로 보내야 하는데 4일 뒤에나 도착한다고 한다. 비자 연장 거절 받으면 바로 와야 했기에 4일은 너무 긴 시간이어서 호스텔에 맡기려고 했지만, 보관할 장소가 없다고 했다. 여러 호텔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돌아오는 날 반드시 머문다고 했지만 다들 거절 했다.
예매한 기차표 시간은 다가오는데 자전거 때문에 기차표를 날리게 생겼다. 호텔을 이곳저곳 확인하다가 문득 자전거 가게에 가서 문의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큰 자전거 가게에서는 안 된다고 옆 자전거 가게 가보라고 했다. 옆 자전거 가게는 훨씬 작았는데 사장님이 걱정하지 말라며 자전거를 맡기라고 했다. 보관 비용을 드리려 했지만 괜찮다고 사양하셨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이런 경우가 가끔 있었다. 충분한 여유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는 사람들, 여유 공간이 부족하지만, 일부러 공간을 내어 도움을 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유전자가 있는 걸까? 아니면 천성적으로 이타적인 사람들일까?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존경스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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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터미널이 꽤 컸는데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해 기차에 오른다. 선양에서 베이징까지 700km인데 고속열차로 3시간 30분 만에 갈 수 있었다. 6년 전 중국 여행 당시 서북부와 중남부만 여행했기에 동쪽은 처음으로 가본다.
확실히 베이징은 수도라 물가가 꽤 비쌌다. 일반 도시에선 2만 원이면 (100위안) 개인 호텔 방을 얻을 수 있었는데, 베이징에선 6인실 도미토리 룸을 얻기 위해 4만 원이나 내야 했다. (200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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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바로 이민국으로 향했는데 버스 앞뒤로 보안 직원이 두 명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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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풍경)

이민국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비자 연장이 가능하다고 해서 베이징에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머문 호텔 기록이 있는 trip.com 사이트를 보여줘야 했다. 당시 중국의 새로운 간첩 법이 무서워서 호텔에서만 머물렀는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후 질문이 꽤 까다로웠으며 내가 그동안 방문했던 곳을 적으라더니,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내 핸드폰 사진도 검사했다. 심지어 사진을 클릭한 후 자세히 보기를 눌러서 Meta 정보(사진 찍힌 날짜)도 확인했다. 그러더니 왜 사진 찍힌 장소는 안 나오냐고 물어서 구글에 내 개인정보 주기 싫어서 GPS 기능은 껐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개인정보 내역은 남기지 않는다.)
2016년에 중국 여행하며 3번이나 비자 연장했을 당시에 전혀 이런 게 없었던지라 당황스러웠다. 300명의 외국인이 가입한 중국 비자 와썹 그룹에 문의했지만 비자 연장 당시 핸드폰 검사당한 건 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서 핸드폰 사진첩에는 관광 사진 위주로만 남겼고 메인 카메라는 들고 오지 않았기에 별문제 되는 건 없었다.
이민국에서 주는 검정 재킷을 입고 옆방에 가서 사진을 찍고 비자 연장비를 냈다. 직원 말로는 얼마나 줄지 모른다며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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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공원을 산책했는데, 신기한 걸 보게 되었다.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의 프로필이 공원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종이에는 이름, 성별, 나이, 직업, 대략의 생김새, 전화번호 등이 적혀있었다. 재밌는 점이 얼굴 사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부모님이 자식 몰래 여기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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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관광을 하고 싶었는데 모든 게 디지털화되어 있어서 앱으로 며칠 전에 예약해야 했으며 피서철이다 보니 방문 수 제한이 있는 곳은 예약이 불가능했다.
앱 자체도 너무 헷갈리며 영어가 전혀 없다 보니 스크린샷을 찍은 후 구글 번역 앱에 가서 일일이 번역 후 다시 돌아와서 하고 하다 보니 너무 어려웠다.
입장료는 위챗페이로만 가능한데 위챗페이는 중국 통장이 없으면 사용이 안 되었기에 애당초 사용 자체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디지털 예매 없이도 방문 가능한 곳인 경상 공원을 알게 되어 자금성 전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한참 관광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2주만 연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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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비자 연장인데 비자 처리 기간은 10일이나 걸렸다. 이후 수시로 와썹 그룹을 살펴봤지만 2주만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른 외국인들은 전부 한 달 연장을 받았었다.
여권은 비자 처리 기간 이민국에 맡겨놔야 했지만, 다행히도 이 노란 종이를 대신 줬는데 이걸로 기차도 타고 숙소에도 머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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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짜리 비자 연장인데 비자 처리 기간 10일 동안 베이징에 있으면 비자 연장한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비싼 돈을 내고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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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으로 돌아와서 내 자전거를 맡아주신 사장님과 기념사진을 찍고 바로 다음 도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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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포장도로는 꽤 좋았지만 도심 속에서 차들과 함께 자전거 타는 건 꽤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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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마주한 이상한 도시. 중국 동북지역엔 이런 곳이 꽤 있었다. 건물들이 완공은 안 되어 있고, 주변에 상가들은 다 죽어있고 포장도로는 꽤 넓게 잘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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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적 여유가 없다 보니 밤에 자전거 타는 일이 종종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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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골 마을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밖에 나왔는데 비둘기 고기를 팔고 있는 식당을 발견했다. 비둘기들은 자기네들이 곧 잡아먹힐 거란 걸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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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시골을 빠져나가는데 베이징과는 너무나도 크게 차이 나 보였다. 한국도 지역 불균형 발전 문제가 대두되고 있지만, 중국은 광활한 영토 때문에 더욱 심한 것 같다. 베이징에서는 무인 버스와 택시가 다닌다고 하는데, 시골 지역에서는 여전히 삼륜차가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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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갈수록 길옆에 옥수수밭이 자주 보였다. 북한 북부 지역에서도 옥수수 재배가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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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정말 많이 내린 날이었다. 밤늦게까지 자전거를 타야 했고 나중에 폭우 속에서 계속 이동해야 했다. 숙소를 잡자마자 가방에 모든 물건을 꺼내서 말렸다. 다음날 너무나도 쉬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바로 떠나야 했다.

이후, 다음 도시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모든 호텔에서 내 숙박을 거절했다. 심지어 가장 좋은 시설을 갖춘 호텔에 갔는데도 거절당했다. (소도시라 시설 좋은 곳이 4~5만 원 정도였다.)주숙등기 문제 때문에 캠핑을 할 수 없었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결국 한 군데 호텔을 더 들러보고, 안 되면 경찰서로 가기로 했는데, 다행히 마지막 숙소에서 나를 받아줬다.
2016년 여행 당시에는 단 한 번도 외국인이라고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현지인처럼 보였던 덕분에 별다른 문제 없이 받아주는 곳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여러 번 거절당했다. 예민한 지역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중국 정부가 엄격해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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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열심히 자전거를 탄 후 백두산 서파 마을인 송강하(Songjianghe)에 도착했다. 다음 날 아침 기차를 타고 바로 베이징에 가야 했는데 운 좋게도 호텔 사장님께서 내 자전거와 짐을 맡아주시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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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찍 일어나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와서 3인실 침대가 있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이후 고속열차로 갈아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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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드디어 여권을 돌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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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일부 젊은 사람들의 패션은 개성 넘치고, 창의적이었다. 사진으로 담지 못했지만, 가끔 길에서 본 사람 중에 ‘와…. 저렇게 입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멋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자유로운 패션을 보며, 정치적 억압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스타일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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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백두산 근처 송강하 마을로 돌아가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비행기를 타야 했다. 비자 연장을 받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돈을 써야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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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서파를 가기로 했는데, 중국 정부 모바일 앱에서 신청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했다. 결국 호텔 사장님께서 도와주셨다. 결제 부분에서 위챗페이가 없어서 사장님께 현금을 드리고, 사장님이 대신 예약을 해주셨다. 서파로 가는 버스 정류장은 호텔 근처에 있었다. 큰 버스를 탄 뒤에는 중간에 승합차로 갈아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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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안개가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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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서파는 1,422개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가마로 실어 나르는 분들이 있었다. 날이 너무 안 좋아서 대피소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 놀랍게도 많은 단체 관광객이 한국인이었는데, 대부분이 중노년층이었다. 젊은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직원에게 셔틀버스 막차가 몇 시냐고 물으니 그런 거 없다고 마지막에 타는 사람의 차가 막차라고 했다. 혹시나 해 계속 기다렸지만, 백두산은 계속해서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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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고 해서 안개가 걷힐 것 같지 않아서 결국 오후에 등반을 시작했다. 단체 관광객들이 모두 다 하산해서 조용히 백두산 천지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아쉬운 마음에 계속 기다려봤다. 모든 관광객이 떠나고 나와 중국 커플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천지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내게 말을 걸어왔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구글 번역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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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이제 곧 정리하고 내려가야 해. 왜냐하면 여기 국경 관리대가 도착하거든. 너무 늦게 하산하면 북한 경비원이 쉽게 여기 올 수 있어.’
백두산 천지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이 맞닿은 곳이다. 아마도 중국 관리 직원과 관광객들이 모두 내려간 뒤 북한 국경 관리대가 와서 점검하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북한 사람을 마주칠 뻔했나 싶었다.
백두산 천지를 제대로 못 보고 간다는 게 너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내가 탄 버스는 막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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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중간에 트렉킹할 수 있는 곳에 버스를 세워주셨는데, 백두산은 천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태계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송강하에 돌아왔지만,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국경선까지 자전거로 가려면 서둘러야 하지만, 이대로 그냥 떠나기엔 너무 아쉬워 호텔 사장님께 내일 날짜로 백두산 남파를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파는 교통편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가야 하며, 서파와 북파보다 예민한 지역이라 한국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다. 후기를 읽어보니 여권을 여러 번 검사하는 등 까다로워 보여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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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사장님이 마련해 준 택시를 타고 가는 길 날이 너무 맑아서 굉장히 흥분되었다. 남파 가기 전 검문소에서 내 여권을 검사했는데 호텔 사장님이 직접 연결 해준 택시라 그런가 쉽게 통과할 수 있었고 이후 택시에서 내려 등산로 입구에서 여권을 보여줬는데 별문제 없이 바로 통과 되었다. 택시 기사님은 내가 구경하고 돌아올 때까지 입구 주차장에서 기다리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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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합차를 타고 정상으로 향했는데 왜 이곳이 여권 검사를 까다롭게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내내 북한이 바로 옆에 있었다. 푸른 아름다운 시냇가 옆에 철책은 이질감을 주었다. 철책 너머 북한 초소에 있는 북한 군인을 보기도 했었다.
중간에 경고 문구도 있었다. ‘사사로이 변경(국경) 넘나드는 것을 엄금하며(엄하게 금하며) 일체 마약밀수 활동을 엄금한다 (엄하게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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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를 향해 점점 올라가는데 푸른 하늘이 계속되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 남파 입구에는 나무가 울창했지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초원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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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내내 오른쪽 창문 너머로 철조망이 보였다. 초록색은 중국이 설치한 것이며 하얀색은 북한이 설치한 철조망이다. 북한 철조망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하얀 페인트칠을 해놔서 사진을 자세히 봐야 보인다. 중국이 설치한 초록색 철조망이 훼손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여러 구간에서 봤는데, 중국 쪽에서는 철조망 관리를 별로 안 하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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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파와 달리 남파는 따로 올라가야 하는 계단이 없었으며, 차가 세워준 곳에서 천지까지 5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었다. 천지를 보러 가는 그 짧은 길에 믿기지 못할 풍경을 보게 되었다. 북한군이 철조망을 수리하며 페인트칠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북한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중간중간 지켜보는 중국 직원들이 있어서 흘긋흘긋 북한군을 쳐다봤다. 철조망 너머에는 총을 들고 있는 북한 군인 한 명과 총 없이 철조망을 고치고 있는 북한 군인 네 명이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하는데 북한 사람들은 저 울타리 밖을 못 나간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도 복잡한 마음으로 천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데, 그 순간 믿기지 않는 풍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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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가 너무나도 장엄해서 순간 세상 근심 걱정을 잊게 되었다. 세계 여행하면서 이렇게 압도적인 풍경은 페루 마추픽추,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등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백두산 사진을 수천 번을 보게 되는지라 백두산 풍경에 대한 별 기대는 없었다. 백두산에 오른 것은 슬픈 분단 역사에 대한 극복을 위험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멋진 자연 풍경이 펼쳐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벽들이 정말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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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색도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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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서 기념사진

백두산 천지를 본 후, 도로 반대편에 있던 편의점에서 옥수수를 사 먹으며 철책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북한 군인 3~5명이 함께 다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들의 체격이 너무 왜소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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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를 다 본 후, 내려가는 길 중간에 승합차가 잠시 멈췄다. 그곳에서 백두산의 또 다른 멋진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본 백두산의 풍경은 정말 다채로웠는데, 북한 쪽에는 어떤 풍경이 있을지 궁금했다.
내 평생 한반도에서 백두산을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우리 윗세대는 언젠가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내 세대는 그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다음 세대는 아마 통일은 불가능할 거로 생각하고, 심지어 그런 바람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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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다 보고 난 후 백두산 남파 입구에서 나오는데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건물을 보니 조선 민족 문화관이었다. 베이징 고속 열차를 타고 갈 때 한국 한복과 아리랑 등이 화면으로 중간중간 흘러나왔다.

중국에는 56개의 민족이 있으며, 한족이 약 92%를 차지하고 소수민족은 8%를 차지한다. 대부분의 소수민족은 수백 년에서 수천 년의 역사가 있지만, 조선족만이 100년 남짓한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유일한 소수민족이다. 조선족은 조선 말기 그리고 일본 식민지 시절에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민족이다. 한반도가 둘로 나뉘기 전에 북쪽 지역 사람들이 중국으로 많이 이주했기에 그쪽 지역의 말투(현 북한 말투)를 사용한다.
최근 들어 중국 정부가 이러한 조선족을 정책적으로 부각하고 있는데, 한국인으로서 동북 공정의 의도가 느껴져 동북 지역을 여행하며 아리랑이 들리거나 한복을 보게 될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조선족의 역사가 한반도에서 비롯된 만큼, 그들에게 조상의 노래인 아리랑을 부르지 말라거나 조상의 옷인 한복을 입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이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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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정치의 뒷면에는 우리 ‘일반’ 사람들이 있다. 백두산 여행을 도와주신 중국 호텔 사장님.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반가워하며 조선족 현지인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복잡해도 우리 ‘일반’ 사람들은 계속해서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남과 북에 사는 우리 ‘일반’ 사람들도 아무리 정치 상황이 복잡해도 서로 연결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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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밑에 장엄한 백두산 천지를 구경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송강하를 떠날 수 있었다. 이후 도착한 도시는 이도백하라는 곳인데 거기는 북파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이날 관광버스를 자주 봤으며 버스 앞 창문에는 여러 한국 단체 이름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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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백하 떠나 다음 도시로 향하는 길에 정말 불쾌한 일을 겪었다. 한 차량이 천천히 내 옆으로 따라가며 밥 먹었냐고 물었다.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거 좋아하고 또 중국에서 이렇게 말 거는 사람이 잘 없어서 반가워서 웃으며 밥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자전거 페달을 계속 돌렸다. 그런데 천천히 내 옆에 따라오면서 뭐라고 묻는데 좋아하냐, 뭐 그런 질문이었다. 하지만 기초 중국어만 할 줄 알아서 제대로 못 알아들었는데 손가락으로 성적인 그런 걸 보여주길래 기겁하고 무시하고 달렸더니 결국 제 갈 길 갔다. 중국은 나름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길에서 이런 성희롱을 당하니 너무 화나고 짜증 났다.
이후 얼마 안 가 또 다른 차가 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이 핸드폰에 준비한 핸드폰 번역기를 내게 보여주는데 영어가 아닌 한국어가 보였다. 친구 하자 돈 줄게 이런 내용인데 뭐 그 뒤는 뻔한 내용 아니겠는가. 너무 짜증 나서 소리쳐 호통치고는 계속 달렸다. 도대체 내가 한국인인 건 어떻게 알고 한국어 번역기를 준비한 것인가에 대한 공포감이 몰려왔다. 여기 한국 여성이 혼자 달린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난 건가? 두 번 연달아 성희롱당한 건 처음이라 갑자기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중국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까 싶었지만, 말도 안 통할 테고 다음 마을까지 경찰이 차로 태워줄 거 같지도 않고 어쩔 수 없이 계속 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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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했던 이도백하 도로를 지나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해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그런데 간판들에 한국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족이 사는 마을인가 싶었지만,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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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룻밤 머물 호텔에 들어갔는데 직원분이 내 여권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내게 이건 어디다 적느냐며 화면을 보여주셨다. 호텔 시스템에 등록하는 게 아니라 경찰 시스템에 등록하는 거 같았다. 시스템 등록이 복잡해서 외국인을 안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인 자체를 못 받는 호텔도 있는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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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으로 가는 도로 표지판에 한국어가 계속 적혀 있었다. 한국어는 한국에서만 쓴다고 생각했는데 외국에서 한국어를 보니 신기했다. 6년 전 중국 서북부 신장 여행할 때 도로에 아랍어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과 같은 상황인데 내 모국어가 적혀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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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에 도착해서 중국의 큰 은행 중 한 곳에 가 환전하려 했는데 현지 통장이 없으면 환전을 못 해준다면서 은행 밖 모퉁이에 가면 환전원이 있을 거라고 은행 직원이 알려줬다. 연변은 조선족 자치 도시 중 가장 큰 도시이기에 한국어가 통할 줄 알았는데 은행 직원이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은행 모퉁이에 가보니 중년 여성분들이 4~6명 앉아 계셨는데 조선족이었다. 알리페이 돈을 드릴 테니 환전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은행가라며 모른다고 엄청 퉁명스럽게 화난 말투로 말하셔서 당황스러웠다.

조선족의 도시라 그런가 대부분의 간판에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한족이 운영하는 곳은 굴림체 같은 딱딱한 폰트를 사용하는데 조선족이 운영하는 곳은 요즘 한국 사람들이 쓰는 간판 폰트를 쓴다고 한다. 간판에 한국어가 적혀 있는 몇몇 식당에 가봤는데 메뉴에 한국어가 적혀 있었지만, 번역이 엉망이라 여기서 한국 음식 시켜 먹으면 맛없겠다 싶어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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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련된 폰트가 적힌 식당에 들어가니 인테리어도 한국적이었고 메뉴에 적힌 한국어도 다 제대로 되어 있어서 밥을 시켜 먹어봤는데 맛있었다.
한반도 북쪽(현 북한) 사람들이 1900년 초 중반에 중국으로 많이 이주했었는데 그래서 북한 음식인 두부 음식이 잘 발전되어 있다. 왼쪽으로 세 번째 사진 남성분이 먹는 음식을 자세히 보면 양념이 얹어진 두부를 수저로 퍼서 드시고 계신다.
네 번째 사진은 내가 시켜 먹은 순두부찌개.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뭉툭한 우동 떠먹는 수저를 쓰는데 조선족 식당은 한국 수저를 사용해서 편리했다.
순두부가 맛있어서 다음날 또 같은 식당에 갔다. 콩국수가 무슨 맛일지 궁금해서 시켜봤는데 맛이 참으로 이상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거라 그렇게 느껴졌던 거 같다.
마지막 사진은 이쪽 지역에서 먹은 음식인데 철판에 계란 네 개 그리고 두부가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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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로 넘어가 페리를 타야 했기에 알리페이에 남은 돈을 빼야 했는데 몇몇 슈퍼에 들러서 혹시 알리페이 돈을 전송할 테니 현금을 주실 수 없냐고 하자 다들 거절했다.
그러다가 들어간 슈퍼에서 직원이 영어를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 중국은 영어가 잘 안 통하는 나라라 신기해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조선족분이셨다. 다들 현금결제를 안 해서 갖고 있는 현금이 없고 지금 은행 갈 시간도 없다고 하셨다. 내일 미리 은행에 가서 돈을 뽑아오겠다며 내일 오후에 다시 오면 거래해 주시겠다고 했다.
다음날 슈퍼에 가니 어제 봤던 직원이 없었다. 혹시나 얘기를 해보니 어제 봤던 분은 사장님 딸이라고 하셨다. 결국 알리페이에서 돈을 다 뺀 후 현금을 얻는 데 성공했다. 사장님께 감사의 표시로 약간의 현금을 드리려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한다고 하니 캠핑에서 라면 끓일 때 먹으면 맛있을 거라며 감사하게도 각종 장아찌를 주셨다.

현금이 준비되었기에 환전하러 다른 은행에 가봤는데 이번에도 중국 통장이 없으면 환전이 안 된다고 했다. 은행 직원이 은행 안에 있는 ATM 옆에 있는 여성을 가리키며 저 사람에게 환전하라고 했다. 환전원과 얘기를 해보니 이번에도 조선족이었다. 별문제 없이 환전은 했지만, 길거리 환전은 불법일 텐데 은행과 연계해서 이 불법적인 일을 조선족이 도맡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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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공원에는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가득 찼지만, 대부분이 한족 같았다. 한국어로 된 노래는 전혀 들리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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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가니 조선족은 다리 밑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아리랑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슬픈 감정이 드는 한편 복잡한 마음도 들었다. 조선족 환전원, 조선족 슈퍼마켓 사장님, 다리 밑에 춤추는 조선족. 한인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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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두만강에 도착했다. 다리 건물 위로 올라가 북한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입구에서 신분증을 보여줘야 했는데 내 여권을 보더니 안 된다며 거절했다. 마음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현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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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강가 공원으로 나와 철창 너머로 북한을 바라봤다. 새들이 자유롭게 철창 너머로 다니는 걸 보니 동물 중에 가장 큰 구속을 당하는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새들은 여권 없이도 수만 리를 날아갈 수 있지만 인간은 여권이 없으면 본인이 태어난 나라를 벗어날 수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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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반대편에 보이는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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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서 철조망을 지우고 외국인들에게 여기는 어딜까? 라고 물어보면 북한이라고 말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외국의 초원 풍경 같아 보인다. 그런데 가까이 보면 비극이 넘쳐나는 땅이고, 그 땅이 우리 한반도의 반이란 사실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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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좁아졌다 넓어졌다 반복했다. 여기는 강이 좁으니 탈북하는 사람이 있겠구나 짐작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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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빠져나가 러시아로 넘어간다. 이번 중국 여행은 씁쓸하고 슬프고 가슴 아프고 마음 복잡한 일이 연속해서 계속해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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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 또 다른 한인 디아스포라 고려인의 역사가 남아있는 신한촌 기념비를 방문했다. 신한촌 기념비는 1999년 8월 15일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한민족 연구소에서 건립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한 고려인단체 회장님이 임의로 맡아 관리했었는데 2019년 그분이 별세한 뒤로는 부인분이 관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출입문이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 많은 방문자가 시설물에 접근을 못하는데, 나는 운 좋게도 회장님 부인분을 직접 만나서 고려인의 자긍심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에도 한인 디아스포라들이(고려인)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20만 명의 한국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으로 보내졌고, 너무 힘든 여정이라 가는 도중 2만 5천 명이 사망했다.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은 대부분 경제적 이유로 이동했으며, 농민과 노동자가 많았다. 일부 독립운동가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생계를 위한 정착이 목적이었다. 조선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민한 미국이나 호주 이민자와 같다. 유럽계 미국인이 “난 미국 사람이야”라고 말하듯이 조선족도 “난 중국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 혹은 남북통일 염원 같은 시설물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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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부인분께서 신한촌 기념비 옆 건물의 시설로 초대해 주셨다.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은 개화파 지식인, 독립운동가들이 많았으며,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인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려인 중 일부는 여전히 본인이 한국계 출신이란 걸 말한다. 고려인의 한국 뿌리에 대한 자부심과 남북 평화통일에 대한 소원을 드러내는 모습을 신한촌 기념비 옆 건물에 볼 수 있었다.

조선족, 고려인 모두 조선 말기 그리고 식민지의 비극적인 시절에 발생한 한인 디아스포라이다. 만약 조선이 몰락하지 않고 근대화 성공해서 일본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조선족, 고려인의 슬프고 복잡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남과 북이 분단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남과 북으로 갈린 지 80년, 어쩌면 한반도는 영원히 이렇게 비극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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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앞에서 회장님 부인분과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었다.

최근 이런 질문을 받았다. “도대체 왜 이런 것에 집착하시나요?”

내 대답은 이랬다.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꾸는 것입니다. 세계 여행을 하며 전 세계 사람을 만나서 실제로 겪어보니 아무리 남한이 BTS, 기생충, 노벨 문학상 등으로 이름을 널리 알려도 영원히 북한의 그늘에 가려서 전쟁 중인 국가의 이미지를 못 벗어나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아프리카 사람들도 김정은을 알지만, 대한민국 대통령을 모르는 것이 현실이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김정은 아냐며 끊임없이 놀림당하며 북한의 그늘에 가려진 한반도의 안타까운 현실을 직접 경험해보니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살았을 땐 몰랐는데 전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서 보니 한국이 아무리 잘 나가도 북한의 어두운 그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직도 100년 전 그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반도에 불어오는 평화일 뿐이다. 그것은 100년 전에 몰락했던 조선과 일본 식민 지배의 비극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 이후에는 분단, 내전, 독재, 기아, 빈곤, 치안 붕괴 등의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일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미래만큼은 우리가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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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2년 만에 한국에 귀국하는 배에 몸을 싣는다.

여행 마지막쯤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육체적으로 다치거나 물질적으로 손해 보거나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괴로웠던 사건이 연달아 두 개가 일어났었다.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닌데 내가 오버하는 건가 싶지만, 책을 출판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 용기가 생길지, 그냥 평생 혼자 묵혀둘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내 여행에 있어서 어쩌면 마지막 가장 큰 고비였고, 어쨌든 무사히 잘 넘겼으니 다행 아닌가?

페리가 출발하고 마침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안전한 내 고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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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행 마지막 경로에서 한국인 디아스포라 현실을 마주하고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에서 마주한 한반도 분단의 현실로 인해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의 뿌리의 역사를 마주할 수 있음에 이 세계 여행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거의 채워진 느낌이다.

세계여행의 진짜 마지막 퍼즐 조각은 한국 자전거 여행이다.

12년 만에 처음 가보는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해로 가는 배는 24시간이 걸린다. 비행기로 연변에서 바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12년 만에 가는 건데 2시간 만에 들어가면 허무할 거 같아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들어가고 싶었다.

한국에 12년 만에 귀국하는 마음의 준비 시간이 24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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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 초반 2011년부터 자전거 여행 중 두 개의 언어로 블로그를 계속 유지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여행기를 공유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블로그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셨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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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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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 영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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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1. 2006년 자전거로 중국을 종단한적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여정을 멈춰야 했지만 그때의 강렬했던 기억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효진씨 여정은 12년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얼마전 페이스북을 통해 다시 보게 되었는데,설마 그때의 효진씨라고 생각 안 했었는데 그 효진씨가 맞더군요 효진씨의 12년은 하루하루가 살아 있었을테지만 저의 그 시기는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한 기억밖에 없어 삶의 비루함을 느끼며 동시에 경외감이 드네요,고생 많이 하셨고 축하 드립니다 효진씨 나이에 저에게도 분명 기회가 있었죠,후회합니다 그때 하지 못한걸,,,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진 모르겠지만 12년전 결심하신것처럼 그냥 just do it하시길 바래요

    • 안녕하세요!
      제 여행을 기억해주시고 긴 여행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이 끝나고 새로운 챕터를 향해 가려는데 아직은 헷갈리고 모르는 게 많네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봅니다.
      우선은 그냥 just do it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정말 대단하십니다.기회되면 만나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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